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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전쟁사

6.25전쟁때 전투보급품을 신속하게 공급한 지게부대

많은 사람들에게 6.25 한국전쟁은 점점 잊혀져 가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아직까지 그날의 참상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전투 보급품을 신속하게 공급했던 잊혀진 부대 지게부대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 지게부대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험한 산악지대인 만큼 물자운반에 최악의 지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병력이 부족했던 미군은 원활한 보급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민간인 인력을 요청했습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를수 있는 요소중 하나는 전투 보급품을 신속하게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공포한 긴급명령 제6호 "징발에 고나한 특별 조치령" 에 따라 1950년 7월 26일 각 지역에서 민간인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군인 징집 대상연령이 넘은 인력으로 편성되었던 지게부대는 "근무단", "노무단", "보국대" 라는 명칭으로 지어졌지만 다른 군인들과 달리 지게를 지고 전쟁터를 누비는 모습이 많아, 지게부대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15세였던 진복균씨의 증언에 따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방 산악지대 고지까지 M1 실탄이 든 철통 2개를 멜빵에 짊어지고 기어오르곤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전투지대에서 불순한 기후와 험난한 지형을 무릅쓰고 자동차 수송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보급품을 운반하였고. 탁월한 역량을 인정받은 민간인 수송단은 1951년 7월, 군단 예하의 한국 노무단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들은 전투물자가 필요한 모든 전쟁터에서 탄약, 연료, 식량, 보급품 운반 및 진지공사, 부상자, 전사자 후송 등 모든 병참을 담당했고, 최대한 많은 양을 빠르게 나르기 위해 맨몸의 이들이 택한 도구는 바로 지게였습니다.


 알파벳 A처럼 생긴 지게를 사용한다고 해서 정식 명칭보다 A Frame Army, 지게부대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불렸던 지게부대는 유엔군과 함께 온 전장을 누비며 한국전쟁을 치른 숨은 힘이었습니다. 일부 미군들은 그들을 A특공대라고 불렀습니다.

  

지게부대원들은 매일 10마일(16킬로) 정도 떨어진 고지로 100파운드(45킬로) 정도의 보급품을 운반하고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미8군 사령관 제임스 A. 밴플리트는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병력을 추가로 파병해야만 했을 것"이라며 그들의 활동을 크게 치하했습니다. 

 

지게부대는 철모는커녕 흰색 무명바지, 학생복 등 징집당했을 당시에 입었던 옷 그대로의 차림으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눈에 잘 띄는 복장의 노무대원들은 적에게 총알받이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기붕 전 국방장관에 따르면, "동원된 노무자들의 대우가 제일 나쁘다는 곳을 찾아가보니 부식이라고는 썩은 파, 배추 같은 것, 통조림 1일 7인당 한 개였다"고 했을 만큼 먹을것도  변변치 못했다고 합니다.

 

지게부대의 후신인 주한미군 한국근무단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이렇게 동원된 인원은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며, 그 30여만 명 중 기록에 남은 희생자는 사망자 2,064명, 부상자 4,282명, 실종자 2,448명 등 모두 8,794명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귀향길에는 종군기장, 징용해제통지서, 열차승차권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6.25전쟁 중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지게부대는 지금도 여전히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단순 노동력으로 치부되며 잊혀진 영웅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