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밀리터리/전쟁사

군사적충돌로 미국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 전쟁터는 ‘호령도 통하지 않고 고함도 들리지 않는’ 곳이었기에 지휘관은 북이나 나팔, 깃발을 사용하여 휘하의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깃발은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군기는 절대적인 지휘권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서양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는 부대원들이 군기에 입을 맞춤으로써 충성을 서약하고 있죠. 미양요 당시 미군에 빼앗겼던 ‘수자기’는  말 그대로 전투 현장에서 지휘부를 상징하는 깃발이었습니다.


1871년 4월 24일 강화도 광성보, 미군에 맞선 조선군은 절망적인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 측의 거부를 무시하고 탐침을 시도하여 교전이 일어났습니다.(신미양요) 미 해병대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수륙 양방면에서 포격을 하고 있었죠. 

미군은 당시 산업혁명을 통하여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상당히 현대화를 이룬 레밍턴 라이플을 장비하고 있었고, 화포 역시 포탄이 가지는 물리적인 충격뿐만 아니라, 포탄 속에 화약의 작용으로 목표물에 도달할 때 그 폭발력과 파편에 의한 살상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군의 화기는 임진왜란때 쓰던 화승총에서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고, 화포 역시 구경만 커졌을 뿐 화약을 폭발시켜 포탄을 단순히 날려 보내는 수준의 원시적인 수준이었지요. 화기의 사정거리, 명중률, 파괴력 등의 모든 면에서 조선군은 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전투는 처절했습니다. 미군의 포격으로 성벽이 무너지면 그 곳으로 돌격해 들어온 미군과 힘겨운 백병전이 벌어졌습니다. 조선군은 무기가 떨어지면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면서까지 사투를 벌였습니다. 더 싸울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조선 병사들은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지요. 이 전투에는 미 해군 사상 최초의 사진반이 동행하고 있어서 당시의 전투상황이 사진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 잡힌 조선의 포로들>

미군측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의 피해는 성 안에서의 전사 100여명, 성 밖에서의 전사자 243명, 백병전에서 피살 또는 투신자살이 100여명, 부상당한 포로 20여 명이었습니다. 조선군 지휘관 진무중군 어재연 장군과 형을 따라 백의종군 했던 어재순 형제도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미군의 피해는 백병전에서 조선군의 창에 찔려 전사한 맥키 중위를 포함한 사망자 3명, 부상자 10여명에 불과했죠.

전투가 끝난 뒤 광성진 손돌목 돈대에 높이 휘날리던 ‘장수 수(帥)’자가 새겨진 황색 깃발(수자기)이 내려지고 그 대신 성조기가 내걸립니다. 비록 압도적인 화력에 무릎 꿇긴 했지만 조선군이 보여준 분전은 미군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신미양요에 대한 미국측 기록입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것이다 - 슐레이 대령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백여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 엘버트 가스텔


남북전쟁 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 블레이크 중령


이 전투는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 미 국무장관 포스터



어재연장군기의 영구 반환을 추진했으나 미국 해군사관학교 측이 관련 법령이나 절차상의 사유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우선 장기 대여하기로 하여 2007년 10월 15일부터 이틀간 한미 양측이 어재연장군기의 상태를 점검한 후 대여협정서에 서명함에 따라 10월 18일 워싱턴에서 항공편으로 운송돼 10월 19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재연장군기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보관한 후 10월 22일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설명회에 함께 공개되었다. 2008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에서 특별 전시된 후 2008년 5월 이후 인천광역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전시됐으며, 2009년 이후에는 강화박물관에서 장기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