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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전쟁사

전시에 생존률을 높여준 앰뷸런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어떤 전쟁이든지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 전사자들과 부상병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불과 20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체계적인 야전 의료 시스템이 없었으니 부상병들의 생사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죠. 서구 사회에서는 꽤 오랫동안 부대를 따라 종군한 이발사가 외과수술을 하는 군의관의 역할까지 수행했습니다. 근대에 들어 화기의 살상력이 발달함에 따라 부상병들의 상처도 점차 치명적이 되어갔지만, 의학의 발전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총탄이나 포탄 파편에 의해 팔이나 다리에 심각한 골절이 발생했다면, 그에 대한 최선의 치료는 수족을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야전에서 행해진 부상자에 대한 수술 중 대부분이 절단 수술이었죠.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군의관을 의미하는 속칭이 ‘Sawbones' (톱 Saw + 뼈 Bones) 였습니다. 


19세기까지는 제대로 마취를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운이 좋으면 독한 술 몇 방울을 삼키게 하거나, 이도저도 없을 때는 나뭇가지를 입에 꽉 물려 놓고 수족을 잘라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군의관 한 사람이 하루에 200차례의 수족 절단 수술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평균 4분에 1번꼴의 수술이 이루어진 것이니, 당시 군의관은 의사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수술을 받는다 해도 살아나리란 보장이 없었습니다. 페니실린이 발명된 것이 2차 대전 중의 일이었으니, 그 이전까지는 수술을 하고 나서도 부상자의 생사는 전적으로 하늘에 달린 일이었죠. 수술 후의 과다 출혈이나 파상풍, 수술열 등 2차 감염에 의해 죽어간 병사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19세기 수술도구>


1865년, ‘조셉 러스터’(Joseph Lister)에 의해 석탄산을 이용한 소독법이 알려졌지만 야전에서는 사치스러운 일이었고, 수술 부위에 대한 소독은커녕 피가 흘러내리는 수술대나 수술 기구들도 찬물에 한번 휙 하고 행궈 다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죠. 오늘날의 병원에서도 2차적인 감염으로 사망하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과거 전쟁터에서의 의료수준은 거의 재앙 수준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벌어진 크림 전쟁에서는 모두 70여 만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전사자의 숫자는 그 중 20%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병에 걸리거나 부상이 덧나서 죽은 이른바 ‘병원병’에 의한 희생자였습니다.

  

이런 참극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군대의 의료 시스템 자체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성지 순례자들을 구호하기 위해서 조직된 병원 기사단(Knights Hospitaller) 같은 특수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통합적인 전장 의료 체계가 만들어진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습니다. 


촌각의 차이로 생사가 결정되는 전쟁터에서, 부상자의 상태에 따라 치료의 우선순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개념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년 안쪽의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부상자의 계급에 따라 치료의 선후가 결정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군의관이었던 ‘도미니크 라리’(Dominique Jean Larrey)는 전투에서 대량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상처의 정도에 따라 부상자를 분류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개념을 도입했죠.

<도미니크 라리’(Dominique Jean Larrey)>


부상자를 ‘회복이 불가능한 집단’,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수 있는 집단’, ‘치료를 받지 않아도 회복될 수 있는 집단’으로 나눈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거의 모든 원정에 동반했던 그는 일생동안 25번의 전쟁에 참가하여 대규모 60회, 소규모 400회 이상의 전투를 치렀고 3번이나 부상을 당했던 유능한 외과 의사였습니다. 


야전 의료의 역사에서 ‘라리’의 커다란 업적이 있습니다. 바로 환자 후송에 ‘앰뷸런스’ (Ambulance)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이죠. 오늘날의 구급차에 비하면 들것을 실은 수레에 불과했지만, 이 수레는 ‘나는 앰뷸런스’ (Frying Ambulance)라 불리며 프랑스 군인들의 사기 증진에도 한 몫을 했죠. 


라리가 도입한 앰뷸런스는  미국 남북 전쟁에서도 운용되었는데, 말이 끄는 마차가 아닌 엔진이 장착된 자동차의 형태로 탄생한 것은 1895년 파리 만국 박람회 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등장한 앰뷸런스는 엔진이 달린 차와 침대를 장착한 트레일러 두 대로 연결되어 앞쪽에는 운전자와 의사가, 뒤쪽 트레일러에는 환자와 간호사가 탈 수 있도록 되어 있었죠.


그리고 이 동력 구급차를 최초로 실전 사용한 것은 1900년, 프랑스 육군에 의해서였습니다. 곧이어 터진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이 앰뷸런스는 수많은 부상병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등 공신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군은 이동 외과병원을 설치했고, 의무병에 의한 야전에서의 응급처치를 확대하여 부상병들의 생존률은 획기적으로 높아집니다. 


또한 부상병을 이송하는 데에 헬리콥터가 사용됨으로써 환자가 치료를 받는데 12~18시간이 소요되었던 2차 대전에 비해 베트남전에서는 2시간 이내로 단축되었습니다.  부상자 분류 방식도  즉각·지연·최소·기대 처치 환자군 으로 더 세분화해서 분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빨간약과 아스피린’이 만병통치약으로 통할만큼 의료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병사들에게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