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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전쟁사

한국전쟁당시 치열했던 전투 TOP 10

현재 한반도는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편안하게 살수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6·25 전쟁은 치열했었다.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10개의 전투를 꼽아봤습니다.


10. 춘천전투

▼춘천지구를 방어하던 국군6사단은 9,338명의 병력과 야포1개 대대로 전차와 자주포, 야포로 무장한 3만7,000명의 인민군과 맞서 싸워야했다. 하지만 6사단은 평소 열심히 진지구축을 해뒀고, 다른사단들의 휴가와 외박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의 자체 판단으로 비상경계령을 유지하며 전투태새를 갖췄고, 서울이 함락될때까지도 춘천은 인민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09. 의정부 전투

▼중공곤과 소련군 출신에 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 장병으로 구성된 보병 2개사단에 93대에 달하는 T-34전차, 인민군 포병의 3분의1이 의정부에 밀려왔다. 병력이 4,500명밖에 없던 국군 7사단은 그대로 무너졌고, 서울을 지키려고 후방에서 지원된 병사들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서울은 3일만에 인민군이 점령하였다. 


08.한강 방어전

▼참모총장이 한강 다리를 너무 일찍 날렸다. 당시 폭파 시점에 국군 5개 사단이 한강 이북에 남아 있었는데, 퇴로가 사라져 병력이 모조리 와해됐다. 그 때문에 당시 국군의 전력은 전쟁 시작 전과 비교해 5분의1 수준이었다. 유일하게 건재한 상태에서 철수한 백선엽 장군의 1사단조차 병력의 절반을 잃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강 방어를 맡은 김홍일 소장은 각 사단의 생존자를 재편성한 후 한강 전선에 배치해 인민군의 도하를 막았다. 이후 5일간 한강 일대의 노량진, 영등포, 여의도 등지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인민군의 전차가 한강을 건 너는 순간 효과적인 대전차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추풍낙엽처럼 밀려났다. 


07.화령장 전투

▼상주와 김천 일대에서 방어전을 맡은 국군 17연대는 혼자서 인민군 1개 사단을 박살 내는 기염을 토했다. 고갯길의 이점을 살린 고전적인 매복과 기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7연대가 담당 구역을 잘지켜도 헛수고였다. 서부전선의 미군이 당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철수하였다.


06.포항여중전투

▼"포화속으로" 라는 영화로 잘알려진 포항여중 전투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북한군이 쉽게 점령할수 있었다. 비극적인건 포항시내가 점령될때 분투했던 71명의 항도병들은 정식 군인도 아닌데다 훈련도 부족했다. 하필 인민군 별동대가 사단 후방 지휘소를 공격하는 바람에 학도병이 최전선에 나가 싸웠고 12시간에 걸친 분투속에 48명이 전사하고 6명이 실종됐지만, 인민군의 진격을 12시간 가까이 지연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수많은 포항시민이 피난할 시간을 벌수 있었다.


05.다부동전투

▼인민군은 전쟁을 시작한지 50일째 부산을 함락시키겠다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대구함락은 대한민국의 붕괴를 뜻했다. 하지만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장군의 선두 돌격을 앞세워 8월 한달동안 하루 최고 7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대구의 관문 다부동을 지켜냈다.


04. 서울시가전

▼인민군은 서울 일대에 남아 있는 전력으로,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남쪽에서 공세를 준비하던 병력까지 서울로 불러들여 방어에 투입 했다. 하지만 연이은 공세 실패와 보급품 부족으로 허덕이던 인민군이 압도적인 화력의 뒷받침을 받은, 국군과 유엔 연합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인천에 이어 서울에서도 공격의 선봉에 선 남한의 해병대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중앙청 옥상에 태 극기를 다는 데 성공했다


03.장진호 전투

▼서울 탈환 이후 중공군의 출현으로 다시 남쪽으로 밀려났고, 이때 함경남도를 장진호 일대로 진격하던 미 해병 1사단에 중공군의 공격이 집중됐다. 이때 미해병 사당장의 지휘아래 10배가 넘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흥남까지 철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어진 미군 해병의 반격에 중공군은 엄청남 피해를 보았다


02.도솔산전투

▼귀신 잡는 한국해병의 신화를 만든게 도솔산전투이다. 이곳을 공격한 미 해병사단의 선발대는 국군 해병대였는데, 포병과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이 전부 실패하자 국군해병대가 단독으로 야간기습을 감행하였다. 방심하고 있던 공산군은 그대로 당하였다. 이전투로 해병대는 무적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01. 백마고지 전투

▼고지 쟁탈전중 가장 치열했던 곳이 백마고지 전투이다. 북측 중공군의 3개 사단이 이곳을 맹공격했으나 차지하는데 실패하였고 전투기간 6일중 고지의 주인이 7번이이나 바뀌었다. 양측 사상자는 1만8,000명이 달했고 포탄이 무려 27만발이 쏟아졌다. 덕분에 산은 낮아졌고 이렇게 민둥산이 된 모습이 마치 백마의 잔등과 닮았다고 해서 백마 고지라는 이름이 붙은 거다. 9사단을 백마부대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 전투에 참여했 고지라는 이름이 붙은 거다. 하지만 휴전 회담결과 비무장지대에 귀속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