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계약에 의해서 특정한곳에 소속되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을 흔히 프리랜서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Free Lance'로 표기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서양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왕과 왕, 영주와 영주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던 당시, 단연 전투의 주역은 뛰어난 승마술을 자랑하는 엘리트 전사 집단인 기사들이었습니다.
온몸에 중장갑을 두르고 말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기사들은 오늘날의 탱크와 같이 전투의 향방을 좌우하는 존재였고, 당시 보병들의 존재는 기사들을 보조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4세기, 이전 천여 년 간 유럽 전장의 주역이었던 기사들의 몰락을 재촉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1315년 11월, ‘모르가르텐’ 전투에서는 기병 위주로 편성되었던 오스트리아 원정군 5천이 농민으로 구성된 스위스의 창병 2천명에게 격파 당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스위스 창병들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군처럼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그들의 주 무기인 ‘미늘창’(할버드, Halberd)을 이용해 말 위의 오스트리아 기사들을 도륙했습니다. 스위스 창병대가 선보인 미늘창의 끝에는 날카로운 못과 갈고리가 달려 있어 찌르고, 베고, 끌어 내리는데 큰 위력을 보였습니다.
산악지방 출신인 스위스 인들은 유난히 팔 힘이 세서, 미늘창으로 적 기병을 내려치고, 갑옷과 투구를 절단한 다음 말 위에서 끌어 내리는 방식으로 오스트리아 기사단을 격파했습니다. 이 전투는 보병이 기병을 무너뜨린, 전쟁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창병이나 활을 쏘는 보병들의 사회적 지위는 아주 미천해서 그들 대부분은 영주들과의 계약에 따라 보수를 받고 전투에 참가하는 용병들이었습니다. 어떤 영주에게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Free) 계약에 따라 싸움을 벌이는 창병(Lance)은 전문적인 직종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스위스 창병들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습니다.
지금은 알프스 산간의 부유한 금융, 관광 부국이지만, 당시만 해도 주변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외침을 겪으며 척박한 자연환경 탓에 먹고 살기 조차 빠듯했던 스위스 청년들은 외국으로 건너가 용병에 투신했습니다. 험준한 산악에서 워낙 강단 있게 살던 스위스 사람들이라 싸움터에서도 용맹했고, 받은 돈에 대한 대가를 신뢰로 갚았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 왕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직접 탱크로 자동차를 박살낼 수 있는 미국의 군사 테마파크
'밀리터리 > 전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구경기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허무하게 끝난 전쟁 (0) | 2017.11.08 |
---|---|
미군이 배워간 월남전 한국군 최고의 전술 '파이어 베이스' (14) | 2017.03.12 |
군함도라 불리는 지옥의 장소 '하시마섬'의 비밀 (2) | 2017.01.28 |
2차세계대전 미국의 승리를 이끈 비밀무기 '코드토커' (0) | 2017.01.25 |
사진으로 기록된 베트남 전쟁의 처절했던 상황들 (0) | 2017.01.08 |